- 서귀포의 환상(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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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섭
- 나무판에 유채
- 54.7X91.6cm
- 개인소장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다” 이중섭
“나의 귀여운 즐거움이여, 소중한 나만의 오직 한 사람, 나만의 남덕이여.”
이 문장은 화가 이중섭이 아내 이남덕(마사코)에게 보낸 편지 속 한 구절입니다. 1945년, 광복을 앞둔 어느 날 그는 아내 마사코와 가정을 꾸렸습니다. ‘이남덕’이라는 이름은 이중섭이 직접 지어준 것으로,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중섭과 아내, 그리고 두 아들은 전쟁을 피해 원산에서 부산으로, 다시 부산에서 제주도로 끝없이 남쪽을 향했습니다. 겨우 끼니를 잇고, 옹기종기 모여 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절 그의 그림 속에는 그늘 없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특히 〈서귀포의 환상〉에는 탐스러운 열매가 가득 쌓인 가운데, 한 아이가 신선처럼 새를 타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그림 속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마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더 팍팍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중섭도 뒤따르려 했지만, 한국인 신분인 그에게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가족을 떠나보낸 뒤 그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그림 한 장이라도 더 팔기 위해 애썼고, 물감과 캔버스가 부족할 때는 담배 포장지의 은박지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침내 어렵게 모은 돈으로 7일간의 체류 허가를 받아 일본에 건너갔지만, 그것이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귀국 후 야심차게 준비한 첫 개인전은 실패로 끝났고, 희미하게 타오르던 희망의 불씨가 꺼지자 건강도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1956년 9월, 그는 향년 39세로 무연고자 신분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외로움이 깊게 스민 죽음이었습니다.
다시 그의 그림을 봅니다. 그림 속 아이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절절한 그리움이 서려 있는 듯합니다.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아 그린 화가, 이중섭의 마음이 한층 더 애틋하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