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빠르게 흐르고, 돌아보면 이룬 게 없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초라해지고 비난의 화살은 나를 향한다. 자책은 그만, 지금부터는 나와 화해할 시간이다. 김정규 심리학 교수의 40년 연구를 집약한 책.
2026.11.03 손민규 인문 PD
지금 사시면?
북커버 키링 (포인트 차감)
책속으로
완벽해야 한다는 믿음은 우리 삶을 더 나아지게 하기보다 쉼 없이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변화는 완벽해질 때가 아니라, 다음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나는 지금, 나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처음으로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변화는 비로소 그때부터 시작된다. --- 「1장 03 완벽해야 한다는 믿음」 중에서
“그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해야 해.” “왜 그것밖에 못하니?” 이는 권위를 가진 부모나 교사, 그리고 주변의 어른들이 들려주던 말들이다. 이런 말이 반복되면 우리는 그것을 점점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목소리가 내면으로 들어온다. 이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같은 말을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 과정을 ‘내면화’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동등한 자격을 가진 목소리 중 하나였던 것이 내면화되면서 점점 힘을 갖게 되고, 어느 순간 그 목소리가 권력을 차지한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괜찮은지를 그 목소리가 정하기 시작한다. 상전이 되는 것이다. --- 「2장 01 생각은 어떻게 두 개의 목소리가 되었을까?」 중에서
생각을 멈추려 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것이다. 생각이 떠오를 때 잠시 멈추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해보는 것이다. “아,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구나.” “이런 생각이 지나가는구나.” 이는 아주 단순한 말이다. 하지만 이 한 문장이 중요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 순간 우리는 생각 속에 빠져 있다가, 밖으로 한 발짝 나오게 된다. ‘나는 부족하다’에서 ‘부족하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다’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 작은 차이가 중요한 변화를 만든다. --- 「3장 02 생각을 멈추려 하지 마라」 중에서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함으로써 나 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신호이고, 죄책감은 내 행동과의 관계가 어긋났다는 신호이며, 외로움은 타인과의 접촉이 단절되었다는 신호다. 그리고 슬픔은 그 끊어진 연결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고, 분노는 연결성을 지키기 위한 경계의 표현이며, 기쁨과 사랑은 연결이 회복되었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상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감정은 연결이 끊어진 상태를 알려주는, 혹은 연결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몸짓이다. 따라서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을 만들어내는 내면의 관계다. 그리고 그 관계의 중심에는 늘 두 목소리가 있다. 이제 우리는 “이 감정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신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감정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 「4장 01 트라우마와 내면의 목소리」 중에서
내면의 전쟁은 어느 한쪽이 이겨야 끝나는 싸움이 아니다. 상전이 하인을 완전히 굴복시켜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인이 상전을 몰아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말을 듣고, 서로가 안고 있던 두려움과 상처를 알아보기 시작할 때 전쟁은 조금씩 잦아든다. 그러면서 온기가 생겨난다. 따뜻함은 존재가 존재를 만날 때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마음이다. 그것은 애써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니라, 오랫동안 두려움과 방어에 가려져 있던 우리의 본래 마음이 드러날 때 나타난다. --- 「5장 01 따뜻함 - 존재를 만나는 대화」 중에서
어떤 상전은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태어났고, 어떤 상전은 버려지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어떤 상전은 살아남기 위해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상전은 단지 폭군만은 아니다. 한때는 우리를 보호하려 했던 오래된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상전을 향해서도 이전과는 다른 마음 자세를 갖게 된다. 싸우거나 없애려 하기보다는, 한결 여유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 「6장 03 자신과 싸우지 않는 삶」 중에서
초등 학습 멘토 임민찬이 제안하는 하루 한 질문, 한 문장 쓰기. 12가지 주제의 366개 질문에 답하며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생각하는 힘과 꾸준한 쓰기 습관을 기를 수 있다. 그래제본소 펀딩 1,440% 달성작.
2026.11.03 어린이 PD 백정민
지금 사시면?
[단독] 연필&지우개 (포인트 차감)
책속으로
1월 4일 : 공부는 왜 하는 거라고 생각해? 1월 11일 :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한 문장으로 소개한다면? 2월 13일 : 걱정을 줄여 주는 알약이 있다면 언제 쓰고 싶어? 3월 1일 : 내가 만약 독립운동가였다면, 어떤 역할을 했을 것 같아? 5월 6일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은 뭐야? 7월 2일 : 다른 사람의 어떤 점을 나와 자주 비교하게 돼? 10월 2일 : 자유를 누리는 것과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의 차이는 뭐라고 생각해? 11월 15일 : 멋지게 지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12월 22일 : 다음 학년의 나에게 공부 약속을 하나 한다면? --- 본문 중에서
임출육에 관한 정보는 넘쳐나지만, 그 과정을 겪는 여성의 건강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해독 혁명』의 저자 닥터 라이블리가 출산 전후의 신체 변화와 정신 건강을 살펴보고, 건강한 임신과 산후 회복에 필요한 의학 정보를 짚는다.
2026.11.03 가정 살림 PD 송고운
책속으로
‘왜 이렇게 중요한 것들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걸까?’ 난자의 건강은 무엇에 영향받는지, 임신 준비에서 아빠의 몸이 왜 중요한지, 엄마가 먹고 자고 생활하는 방식은 어떻게 아기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출산 이후 엄마의 몸은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 궁금한 것이 끝없이 이어졌다. 원리를 하나씩 알아갈수록 임신과 출산이 더 이상 운에만 맡겨야 하는 막막한 여정으로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순 없다고 해도,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 p.13 「프롤로그 엄마라는 여정을 택한 당신에게」 중에서
무엇보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를 위해 반드시 거창한 치료를 하거나 막대한 비용을 들이지는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매일의 식사와 수면, 생활 습관과 같은 일성에 소소한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 아이의 건강한 출발을 도울 수 있다는 점이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결정적인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이제부터 그 답을 시기별로 나누어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p.38 「1장 엄마가 되는 여정, 몸의 원리부터 이해하라」 중에서
이처럼 난자와 정자의 메틸레이션 패턴은 나이와 생활 습관의 영항을 받는다. 나이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메틸레이션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몸의 환경을 돌보는 것은 가능하다. 특히 난자와 정자가 성장하고 성숙하는 임신 전 3개월은 이러한 노력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다. 이것이 내가 임신 준비 3개월을 ‘골든 타임’으로 강조하는 이유다. --- p.81 「2장 임신 준비기, 몸의 환경을 바꿔라」 중에서
“혹시 향수를 지주 사용하시나요?” 환자는 항을 좋아해 집안 곳곳에 디퓨저와 방향제를 두고, 외출 전에는 늘 향수를 뿌린다고 했다. 또 식습관은 어떻냐고 물어보니 식사는 대부분 배달 음식이나 외식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종종 가슴이 철렁한다. 임신 준비는 엄마와 아빠의 몸을 가능한 한 건강하고 균형 잡힌 상태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때 스트레스나 수면 부족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강력하게 생식 건강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환경호르몬’이다. --- p.97 「2장 임신 준비기, 몸의 환경을 바꿔라」 중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이 체크리스트를 가볍게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내가 난자와 정자에게 어떤 한경을 만들어주었는지 돌아볼 수 있다. 외식이 찾았다면 다음 주에는 집밥을 조금 더 늘려보고, 스트레스가 많았다면 충분한 휴식과 숙면을 챙겨보자. 이런 작은 실천이 반복되면 자연스럽게 나만의 3M 생활 루틴이 만들어진다. 그 루틴은 난자와 정자가 자라는 환경을 더 건강하게 만들고, 건강한 임신은 물론 태어날 아이의 평생 건강을 떠받치는 든든한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 p.141 「2장 임신 준비기, 몸의 환경을 바꿔라」 중에서
임신 사실을 알리면 “회는 먹지 마세요”, “날것은 되도록 피하세요”라는 이야기를 흔히 듣게 된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를 모른 채 무작정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해서 듣다 보면 오히려 답답함과 반감만 생기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것은 무엇이 왜 위험한지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다. --- p.149 「3장 임신기, 몸의 변화를 이해하고 대처하라」 중에서
수유는 출산이 끝난 뒤 새롭게 시작되는 일이 아니다. 엄마의 몸은 임신 기간부터 젖을 만들 준비를 시작하며, 출산 직후에는 곧바로 수유 체제로 들어간다. 그럼에도 많은 임신부가 수유를 출산 후에 고민할 문제로 미뤄두곤 한다. 하지만 출산 방식을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수유 방식 역시 출산 전에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할 중요한 선택이다. --- p.204 「3장 임신기, 몸의 변화를 이해하고 대처하라」 중에서
돌이켜 보면 출산 과정에서 내 뜻대로 된 것은 거의 없었다. 기다림도, 진통도, 출산의 흐름도 모두 예상과 달랐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왜 이 길을 선택했는지는 분명했다. 그 기준은 끊임없이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나를 붙들어 주었다. --- p.245 「3장 임신기, 몸의 변화를 이해하고 대처하라」 중에서
2025년에 발표된 대규모 연구에서 30만 건 이상의 임신 사례를 분석한 결과, 출산 후 여러 생리 지표가 회복되는 데에는 산욕기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간 기능 지표와 콜레스테롤 수치는 약 6개월에 걸쳐 회복되었고, 뼈의 대사가 안정되는 데에는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연구에서도 면역 시스템이 임신 전과 유사한 상태로 안정화되는 데 최소 3~4개월, 길게는 6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신 중 느슨해진 관절과 인대 역시 출산 직후 곧바로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회복된다. --- p.274 「4장 산후 회복기, 평생 건강의 토대를 다시 세워라」 중에서
하지만 산후를 단지 조심스럽게 버텨야 하는 위기의 시기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근육과 관절, 인대가 제 기능을 되찾아 가는 이 시기는 몸의 균형을 다시 세우고, 오랫동안 몸에 밴 자세와 움직임을 바로잡을 수 있는 ‘재건의 골든 타임’이기도 하다. 적절한 휴식과 올바른 운동이 함께 이루어진다면 임신 전보다 더 안정적이고 건강한 몸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 p.308 「4장 산후 회복기, 평생 건강의 토대를 다시 세워라」 중에서
2025년 영미권 최고 화제작이 드디어 한국에 출간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연금술사들의 나라 팔라디아. 적에게 붙잡힌 힐러 헬레나, 그녀를 감시하는 페론. 지키려는 비밀과 빼앗으려는 진실 사이에서 숨길 수 없는 감정이 피어난다.
2026.11.03 소설/시 PD 김유리
지금 사시면?
스틸 참 북마크(포인트차감)
책속으로
처음 팔라디아로 이주했을 때 그녀는 그곳이 낙원이라고 생각했다. 고향 에트라스에는 천연 금속 자원이 별로 없었고, 공명은 희귀했다. 연금술 길드가 몇 개 있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누굴 훈련시키지는 않았다. 팔라디아에 도착하자 집에 온 것 같았다. 그녀가 언제나 있어야 했을 바로 그곳을 찾은 것 같았다. 연금술사들 사이에 위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위계는 학생들마저 갈라놓고, 홀드패스트 가문과 긴밀하게 협력하는 독실한 집안들을 길드들과 갈라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복잡성을 이해할 만큼 도시국가 정치를 잘 알지 못했다. 헬레나가 아는 것이라곤 어떤 학생들은 그녀에게 말도 걸지 않고, 그녀가 질문하면 비웃으며, 그녀가 말할 때의 억양과 손짓을 조롱한다는 사실뿐이었다. 나중에서야 그녀는 그들이 길드에 소속된 학생들이며 그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크는 그런 그녀에게 길드 학생들은 헬레나가 길드에 가야 할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도 장담했다. 루크의 가문은 길드원이 아니라 헬레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고 했다. 혼자서는 연금술을 공부할 기회가 아예 없는 사람들 말이다. 길드 학생들은 수업에 출석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자리와 미래는 다 보장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학교 입학은 지위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면허만 얻으면 다 떠났다. 그러나 헬레나는 특별했다. 그녀는 5학년 이후에도 남을 사람, 연금술의 주된 기초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공부할 사람이었다. 그녀는 연금술 탑의 가장 높은 층까지 올라가고, 새로운 발견을 하고, 세상을 바꿀 업적을 내놓을 사람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었다. 헬레나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있는데 왜 그의 가문이 학교에 널리고 널린 길드 학생을 한 명 더 받고 싶겠는가? 루크에겐 헬레나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엉뚱한 자리에 와 있는 게 아니라 특별한 존재라고 자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루크가 옳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녀가 중요한 존재라고, 믿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루크의 가문이 잘못 판단하지 않았다고 증명하고 싶었다. ---1부, p.66-67
“이리 와.” 그는 작고 하얀 알약이 몇 개 든 약병을 꺼내고는 헬레나의 반응을 주시했다. “그게 뭔데?” 헬레나는 페론이 뚜껑을 돌려 열고 한 알을 꺼내자 물었다. 그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착한 아이답게 삼키면 말해주지.” 헬레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힐러들은 보통 정식으로 의료 훈련을 받지 않지만, 헬레나는 의약을 밀접하게 접했다. 작고 하얀 알약처럼 무해해 보이는 물건에 깃든 힘과 위험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널 죽이지 않는다는 건 알지?” 페론이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가 죽이려고 했다면 넌 오히려 냉큼 달려왔겠지.” 헬레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독은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했다. 페론은 헬레나에게 순종이냐 저항이냐를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의 공명이 그녀의 뼛속으로 스며들어 강제로 입을 벌렸다. 그는 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받쳐 들고 알약을 깊숙이 떨군 다음 삼키게 만들었다. 알약은 작은 돌멩이처럼 식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헬레나는 페론이 바로 놓아줄 줄 알았지만, 그는 장갑을 벗고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손끝을 턱선에 놓았다. 목덜미 털이 곤두선 헬레나가 그의 정강이를 강하게 걷어찼다. 페론은 턱을 씰룩거리면서도 놓아주지는 않았다. 그저 헬레나의 다리가 움직임을 멈췄을 뿐. “네가 증오스러워.” 헬레나는 앙다문 잇새로 겨우 말했다. 그는 헬레나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눈의 초점을 흐렸다. ---1부, 175-176
“이건 단 하나의 결말밖에 없는 이야기야. 너희 저항군이 다른 결말을 원했다면, 다른 선택을 내렸어야지. 냉정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내리고, 대의가 올바르기만 하면 승리가 반드시 따라온다는 그 광신도스러운 생각은 버렸어야지. 영원한 불길은 하나도 빠짐없이 머저리들이었어.” 그는 코웃음을 쳤다. “신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면, 아폴로 홀드패스트를 죽이기 더 어렵게 만들었겠지.” 헬레나는 페론을 응시하며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과 그 눈에 깃든 강렬한 분노를 주시했다. “누굴 그렇게 미워하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헬레나는 페론의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몰랐다. 그 분노는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와도 같았고, 그 모든 다짐이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는 그 질문에 잠깐 놀란 것 같았지만, 다음 순간에는 상자가 닫힌 것처럼 감정이 싹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 그는 오만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큰 낫처럼 휘며 미소를 지었다. “그중 대부분은 이제 죽었지.” ---1부, p.301-302
루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계속 말해. 거의 다 왔다고, 원래 상황이 나아지기 직전에 가장 나빠지기 마련이라고, 혹독한 시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난 그냥 그 모든 말이 사실이라고 증명하기만 하면 돼……. 그런데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래서 상황이 이 모양인 거라면?” 그는 죄책감에 찌들고, 원래라면 느껴서는 안 될 온갖 의구심에 시달리는 얼굴로 헬레나를 보았다. 제1시민은 흔들려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들은 곧 신앙의 현현이며, 지상에 내려온 솔의 신성이어야 했다. 모두가 언제라도 그를 위해 죽을 태세인데, 어떻게 그가 스스로를 의심하여 그들의 신앙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2부, p.19
“저희는 죽은 자들과 불사자들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헬레나가 말했다. 그녀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지금쯤이면 그들도 이대로는 영원한 불길이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으리라 생각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 동의한 사람에게만 할 겁니다. 우리 군인들은 대의를 위해 기꺼이 죽고 있어요. 그런데 왜 죽은 뒤에도 계속 싸우면서 산 사람들을 구할 선택권을 주면 안 됩니까?” “네까짓 게 전투에 대해 뭘 알아?” 그 질문은 뒤쪽에서 날아왔다. 돌아보아도 그녀를 노려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가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네 제안은 영원한 불길이 설립된 순간부터 지켜온 모든 가치를 위반하네.” 일바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더러 우리 군인들의 영혼을 지옥으로 보낼 것을 고려하라고? 자네는 서약을 했어, 마리노. 내가 자네를 잘못 판단했나? 자네의 능력 때문에 인간성을 잊은 건가?” “아닙니다!” 헬레나는 좌절감에 거칠어진 목소리로 외쳤다. 손에 힘이 들어가서 파일이 구겨지고 있었다. “저는 대의에 충성합니다. 저는 생명을 지키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네크로맨시에 맞서 싸운다고 맹세했어요. 이건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이에요. 저는 영원한 불길을 위해서 제 영혼도 희생할 마음이 있습니다. 저 말고도 그럴 분들이 있을지 몰라요. 물어보기라도 하면 안 됩니까?” ---2부, p.31-32
“그래, 난 관대하지. 하지만.” 페론이 갑자기 평가하는 눈빛을 띠었다. “그 대신 너도 나에게 뭔가 해주긴 해야지.” 독사 같은 미소가 번득였다. “내가 널 얻으려고 꽤 귀한 정보를 포기해야 했으니 말이야. 그 대가로 내 차가운 심장을 데울 만한 답례쯤은 받아 마땅하지 않겠어.” 헬레나는 속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에 평정을 잃었다. “뭐, 뭘 원하는데?” 그녀는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경우의 수를 따져보려고 했지만, 이미 가능성의 바다에 빠져 죽을 판이었다. 남자들이 ‘답례’라고 여길 만한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다지 열의 있는 말투는 아니군.” 슬퍼하는 척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이 너무 어려 보여서 헬레나는 실제로 뒷걸음질 칠 뻔했다. “내가 뭘 했으면 해?” 그녀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말만 하면, 시키는 대로 할게.” 그는 짖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마리노. 너 정말 절박하구나.” “여기 왔다는 것만 봐도 명백할 텐데.” 그녀는 차마 더는 페론을 보지 못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흠, 아무래도 너는 감사 표현에 있어서 창의력이 없는 모양이니 이렇게 할까. 진심처럼 나에게 키스해 봐.” 그는 말하고 나서야 떠올랐다는 듯이 덧붙였다.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 봐서 내가 정보를 얼마나 내놓을지 결정하기로 하지.” ---2부, p.71-72
불사자. 살인자. 첩자. 목표물. 도구. 헬레나는 페론을 그렇게 보아야 했다. 다칠 수 있는 누군가로 보고 싶지 않았다. 출혈을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사람으로 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손을 뻗으면 자기를 해치려고 한다고 여기는 사람으로 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그의 자존심과 분노밖에 보지 못했다. 이제는 그의 겉모습 뒤에 끔찍하게 비극적인 면이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빨리 그 느낌을 꺼버려야 했다. 케인 페론은 적이었다. 이 전쟁의 원흉이었다. 그는 루크의 아버지를 살해했다. 그녀는 병원 근무를 준비하기 전에 손에 묻은 페론의 피를 씻어내다가 뒤늦게 그날은 비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수첩에 쓴 내용을 들여다보면서 마음속에 엉킨 상반된 감정들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2부, p.144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이었을까? 진짜가 있기는 했을까? 하나도 없었을까? 엄청난 피로감이 그녀를 덮쳤다. 모든 기억이 엉망으로 뒤흔들리고 뒤섞이고 뒤집힌 것 같았다. 명료하게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자고 싶었고, 심연 속으로 다시 가라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기억이 다시 사라질까 두려웠다. 케인은 사라지고, 깨어나면 다시 얼음처럼 차갑고 잔인한 페론이 되어 있을까 두려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케인과 페론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다른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케인은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페론은 괴물이었다. 그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이 그녀의 뼛속에 박혀 있었다. 시신을 쌓아 올려 만든 그 끔찍한 의자, 그것은 페론이 쌓은 희생자들이었다. 그녀는 잊을 수 없었다. ---3부, p.16
“너는 날 구한 게 아니야.” 그는 간신히 말했다. “그저 우리를 2년 동안 지옥에 빠뜨렸을 뿐이지.” 대놓고 때렸다 해도 이보다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헬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고, 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난 돌아오려고 했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그랬어.” 케인의 얼굴이 후회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알아. 그런 뜻이 아니라…….” 헬레나는 그 순간 케인을 보면 토할 것 같아서 몸을 멀리했다. “내가 널 잃어도 살 수 있다는 가정을 하지 말았어야지. 내게 다른 의무가 있다고 해서 너에게 마음을 덜 쓸 거라 생각했어? 나에게 는 너만 한 감정이 없다고? 난 널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 했어. 넌 내가 뭘 했는지 다 알지도 못해.” “난 그저…….” “난 네가 물어볼 때마다 네 것이라고 약속했어. 언제나 그렇다고. 언제나라는 말에는 만기도 예외도 없는 거야.” ---3부, p.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