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는 단어
김화진,황유원,정용준,임선우,권누리,김선형,김복희,유선혜,정수윤,김서해 저
|휴머니스트
- ‘나’를 통해 흐르는 단어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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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와 가까이 살아가는 소설가·시인·번역가 10인의 앤솔로지. 삶과 경험에서 존재한 단어를 들여다보며, 그에 엮인 마음과 이야기들을 전한다. 멈춘 듯 보이던 단어의 의미가 저마다의 서사를 따라 다시 흐르는 순간을 담은 책.
2026.01.30 에세이 PD 이주은
지금 사시면?
2/25 김화진&임선우 작가 북토크
- 책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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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종종을 이럴 때에도 쓴다. 누군가에게 네 생각을 했다고 고백할 때. 그때 당신이 했던 말 종종 떠올렸어요. 가을에 우리 만났던 거 종종 생각했어요. 그런 말을 꺼낼 때 늘 마지막으로 하게 되는 말은 “좋았어요”라는 말이다. (……) 그 말까지 가기 위해 쓰는 종종은 좋은 계단이 된다. 종종이라는 계단이 없으면 바로 본심으로 추락할 것처럼, 그래서 무릎을 찧거나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가 상대방을 쳐버릴 것 같은 걱정이 들 때 종종은 나를 조심조심 걷게 만든다.
--- pp.11-12 「김화진, 종종」 중에서
내가 초를 좋아하는 것은 둥글고 은은하게 퍼지는 그 불빛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라는 단음절 한글 단어의 형상 때문이기도 하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초’는 그 모양부터가 타오르는 촛불을 닮았다.
--- p.31 「황유원, 초」 중에서
이상하지. 더는 붙을 수 없는데 더 붙으려고 하는 쪽이 있네. 비어 있는 공간도 틈도 없는데 더 파고드는 쪽이 있네. 몸이 문이라면 열고 들어갈 텐데……. 질긴 피부와 단단한 뼈에 한계를 느끼네. 나는 네가 아니고 너도 내가 아니라는 결국의 실감. 아무리 우리라고 우겨도, 하나처럼 붙어 있어도, ‘연결되었어’, ‘뒤섞였어’ 감탄사를 내뱉어도, 마침내 실감. ‘나는 나고 너는 너구나’ 그것이 얼마나 서러운지. 아이는 울고 연인은 몸부림치고 친구는 고요히 등을 두드리네. 포옹했다가 떨어져야 하는 아침. 진동하는 지금. 끌어당기는 팔은 밀어내는 팔이 되고 인력은 척력이 되는 더럽게 서글픈 떨어짐과 헤어짐.
--- p.54 「정용준, 포옹」 중에서
그 무렵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빵을 먹으면서 시간이 흘러갔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하루 중 반짝거리는 기쁨의 한 조각을 얻었기에 그 밖의 긴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 p.83 「임선우, 쿠머스펙」 중에서
이제는 애써 과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상한 이 삶이 꽤 마음에 든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 간절히 용기를 내야 하고, 집에서 책을 잃어버리는. 그리고 ‘마음에 든다’는 되뇜이 나를 조금 더 살 수 있게 한다는 걸, 알고 있다.
--- p.120 「권누리, 주인공」 중에서
어쩐지 pang은 내 안 어딘가에서, 가슴에서, 혹은 뱃속에서, 불시에 팡, 터지는 얼음 폭탄 같다. 움찔 소스라쳐 아연하는 사이, 수백만 조각으로 비산한 날카로운 얼음 파편이 혈류에 침투해 온몸으로 퍼진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미소한 얼음 조각들이 흐느끼며 녹아내린다.
--- p.130 「김선형, Pang (n.)」 중에서
빛이란 희망이 필요한 이의 발명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 p.155 「김복희, 빛」 중에서
늘 다른 단어를 기다리는 것이 내 모습처럼 느껴져서. 영영 완성되지 않을 내 미래 같아서. 끝내 빈칸을 채우지 못해 일인분의 몫을 견디지 못하는 의존명사로 남을까 두려워서.
--- p.198 「유선혜, 것」 중에서
루리를 발견했다. 루리의 빛도 닦기 나름. 나도 닦으면, 열심히 갈고닦으면, 빛이 날까, 반짝일까. 내가 앞으로 살면서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나도 빛나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책상 서랍 속에서라도, 빛이 날 수 있다면.
--- p.207 「정수윤, 루리」 중에서
겹소원, 겹슬픔, 겹유감, 겹기억, 겹설렘, 겹기회, 겹행운.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 잊어서는 안 되는 것, 그러나 자꾸만 잊게 되는 것, 꼭 바라는 것 앞에 겹을 붙이고 가만히 지켜본다. 그 모든 것에 해당하는 ‘소망’ 앞에 겹을 붙이고 분열하는 겹소망을 사람들에게 송부할 방법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