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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김상욱 저 |동아시아
변화의 시대, 끝내 변치 않는 진실들
급변의 시대,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변치 않는 기본은 무엇일까? 물리학자 김상욱은 인간과 사회, 우주에 관한 변치 않을 진실들을 되짚는다. 내 안의 혼란과 세상의 혼돈 사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서 길어 올린 의미와 가치를 건네는 책.
2026.06.12 자연과학 PD 이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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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인간과 개는 모두 눈 안의 로돕신 분자로 세상을 보고, 인간과 악어는 모두 미토콘드리아에서 에너지를 얻으며, 인간과 개구리는 모두 정자와 난자의 수정으로 자손을 남기고, 인간과 오징어는 모두 나트륨 이온과 칼륨 이온의 이동을 통해 신경 신호를 전달하고, 인간과 바퀴벌레는 모두 산소호흡을 한다. 인간은 동물이다. 과학이 인간에 대해 알려준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다. 아니, 우리는 다르다고 믿는다. 과연 인간과 동물은 어디가 다른 걸까?
--- p.16

피터 터친의 『초협력사회』는 전쟁 덕분에 인간이 국가와 같은 대규모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집단 내에서 협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다른 이들이 손해를 감수하며 협력할 때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개체에게는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개의 동물 사회에서 대규모 협력을 볼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집단 간 경쟁이 집단 내 개체들 사이의 경쟁보다 치열하다면, 개체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일단 협력하여 집단을 살려야 한다. 인간의 경우 집단 간 분쟁, 즉 전쟁이 충분히 자주 일어나서 서로 협력하는 으로 진화했다는 말이다.
--- p.57

알파노블(AlphaNovel)이라는 가상의 인공지능이 있어서 하루에 소설을 2,000편 쓴다고 하자. 이 정도면 국내 소설의 연간 출간 종수에 해당한다. 알파노블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소설을 귀신같이 써낸다. 작가인 당신은 1년에 한 편 쓰기도 힘들지만, 로봇세나 기본 소득 등으로 여전히 소설을 쓰고 살 수는 있다고 하자. 확률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이 쓴 책은 거의 읽히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알파노블은 당신보다 훨씬 재미있는 글을 쓴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쨌든 글을 쓰며 먹고살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면 되는 걸까? 읽히지 않는 글을 써도 생계만 해결되면 괜찮은 걸까?
--- pp.96-97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여자아이는 주로 소셜미디어에 중독되고, 남자아이는 게임과 포르노에 중독된다. 현대는 과거와 비교하여 완전히 다른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몸을 쓰기보다 머리를 쓰고, 장시간 집중하며,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 엄청나게 다양한 상황에서 유동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이런 능력은 남성보다 여성이 일반적으로 더 낫다고 알려져 있다. 세상이 젊은 남성에게 점점 더 불리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몸으로 부딪치고 동료들과 우정을 나누며 성관계 상대를 찾아야 하는 남자아이는 자신에게 불리한 세상에서 점차 멀어져 게임 속에서 모험하거나 포르노에서 성적 만족을 찾기 쉽다.
--- pp.120-122

농경만 놓고 보면 동양이 서양보다 대략 3,000년 정도 늦었다. 하지만 농경문화의 역사적 진행 과정은 소름 끼치도록 비슷했다.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동서양 모두 작물을 개량하고, 요새를 만들고, 원시 문자를 제작하고, 대규모 마을을 만들고, 동물을 가축화하고, 인간 희생 제의를 시작하고, 정교한 도자기를 만들었다. 동서양은 서로 교류가 없었지만 마치 같은 일정표를 따라 문명을 발전시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시작 시점만 달랐을 뿐 동양인과 서양인은 능력 면에서 이렇다 할 차이가 없었다는 뜻이다. 결국 시작 시점을 결정한 주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만 남는다. 답은 지리다.
--- p.177

인간의 뇌는 외부의 감각 입력에 따라 반응하는 컴퓨터 같은 기계가 아니다. 뇌는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여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계산하고, 가장 그럴듯한 미래를 예측하며 행동한다. 예측이 먼저이다 보니 감각이 주어지기도 전에 몸이 반응하기도 한다. 목마를 때 물을 마시면,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즉시 갈증은 사라진다. 하지만 마신 물이 장에서 흡수되어 혈액에 도달하려면 20분 정도가 걸린다. 물을 마시는 순간 갈증이 사라지는 것은 실제 목마름이 해소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물을 마셨으니, 목마름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에 따라 뇌가 만든 느낌이다. 이 느낌은 너무나 실제 같아서 우리는 물이 혈액에 도달하여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믿는다.
--- p.233

2차 세계대전으로 전쟁터였던 유럽이 초토화되고 미국은 군사, 경제, 정치 모두에서 세계의 중심에 선다. 이제 미국은 영국을 대신하여 세계 경제를 지탱해야 했다. 우선 미국은 달러의 가치를 금에 연동하여 전 세계 사람들의 신뢰를 얻으려 했다. 돈의 가치가 금에서 온다는 것이 인류의 오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달러는 세계의 기축통화로 떠오른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의 재정 적자가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1971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정부는 결국 금본위제를 포기한다. 그 후 지금까지 세계는 명목화폐, 그러니까 순전히 국가의 권위만으로 가치를 유지하는 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돈은 어떤 실물과도 관련이 없다. 원화의 가치는 대한민국 정부가 보장한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면 원화의 가치가 떨어진다.
--- pp.255-256

일본에서 54세 남성이 함께 살던 노모를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 남성은 병든 노모를 홀로 부양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구조 조정을 당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더구나 노모의 병세가 나빠져 많은 치료비가 필요하지만, 집세조차 낼 수 없는 지경이다. 결국 이 남성은 극단적 선택을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정이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사건은 선물이 아닌 교환의 논리가 작동하는 세상의 문제를 보여준다. ‘교환 사회’에서는 줄 것이 없는 사람이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도움을 받으려면 우선 나에게도 무언가 줄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p.291

감정은 당신의 뇌가 신체감각 데이터를 해석하고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감각 입력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입력에 변형을 가하는 능동적 참여자다. 즉, 감각 입력이 자동으로 감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입력 정보를 해석한 결과물이 감정이다. ‘화’가 나서 숨을 거칠게 내쉬는 것이 아니라, 숨을 거칠게 내쉬는 행동을 뇌에서 ‘화’라고 해석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를 ‘구성된 감정 이론(theory of constructed emotion)’이라고 한다.
--- p.301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 김장훈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이 노래에서는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내가 그대 곁에 있음을 기억하라며 위안을 준다. 속이는 것은 인간의 일이고 인간의 일은 인간의 도움으로 해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속이지 않는 자연을 탐구하는 물리의 방법으로 나를 속이는 세상에 대응하는 해결법도 있다. 결국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너무 노하거나 실망하지 말기를 바란다. 찾아보면 해결 방법은 있게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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