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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 프랑스사
주경철 저 |휴머니스트
인문학적 통찰로 가득한 프랑스 통사
서울대 주경철 교수 40년 연구의 결실. 갈리아 문명에서부터 프랑스 혁명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프랑스사를 벽돌책에 담았다. 단조로운 연대기가 아니라 풍성한 인문학적 통찰로 이뤄진 프랑스 통사.
2026.02.20 손민규 역사 PD
책속으로
프랑스의 기원을 베르생제토릭스의 항전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해가 프랑스 원년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베르생제토릭스를 민족 영웅으로 고양한 역사학자 쥘 미슐레가 대표적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제3공화정 시기에 민족주의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분위기를 반영한다. … 나치에 복종한 비시 정권의 지도자 필리프 페탱은 자신을 베르생제토릭스와 동일시했다.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지배자와 협력하여 평화를 구축했다는 식인데, 이는 나치 부역에 대한 변명이었다. 이처럼 베르생제토릭스는 여러 의미에서 민족 영웅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의문이 제기되었다. … 《갈리아 전기》는 자기선전이 목적인 글이다. 광대한 갈리아가 강하게 저항했지만 정복했다는 식으로 서술하여 자신의 위업을 과장했다. 그러나 갈리아의 부족들 모두 로마에 저항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치 프랑스 민족 전체가 외적의 침략에 저항했고, 베르생제토릭스가 그런 저항을 주도한 민족 영웅이라는 식으로 의미 부여하는 것은 왜곡이다. …
--- 「1부 갈리아 문명, 프랑스 이전의 프랑스」 중에서

푸아티에 전투는 기독교권 입장에서 중요성을 지극히 과장했다. 상대인 우마이야왕조는 지중해 동쪽에 중심지가 있고, 이들의 지상 목표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이었다. 711년 에스파냐 정복은 상당 정도 우연의 산물이었다. … 에스파냐에서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갈리아는 사실 너무 먼 타깃이었다. 721~737년 약 10여 년간 공격이 이어졌으나 규모는 바이킹보다 작았으며, 정복보다는 갈리아 남부의 교회 약탈이 목적이었다. 카롤루스 마르텔이 볼 때는 무슬림이나 작센족이나 같은 이단이어서, 애초에 기독교 대 이슬람의 대결이라는 의식도 없었을 터이다. 이 시기에는 아직 십자군이나 지하드 개념도 없었다. 이 전투는 종교 전쟁이나 성전이 아니며, 따라서 문명 충돌로 보아서는 안 된다. …
--- 「2부 왕국의 시작, 프랑크왕국」 중에서

필리프 오귀스트(필리프 2세)는 … 1223년 7월 14일 오랜 치세 끝에 죽었는데, 이날 처음으로 본격적인 왕실 장례 의식을 거행했다. 이때 신체는 죽었으나 승계는 보장된다는 의미를 창안했다. 죽음을 맞는 신체의 몸이 있으나 죽지 않는 몸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국왕의 몸이 죽는다 하더라도 국왕의 기능은 그대로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왕이 죽으면 이렇게 소리친다. “국왕께서 승하하셨도다, 국왕 만세!” 이것이 소위 국왕 이체론(二體論)으로, 국왕권 강화를 통한 국가 권력 안정의 중요한 상징이다. 살아 있는 왕은 언젠가 소멸하게 될 육체를 지닌 인간적인 존재이지만, 왕국을 지배하는 최고 주권자로서 왕은 초시간적인 영원불멸의 존재다. 이후 국왕 이체론은 프랑스 군주정을 지탱해 온 정치신학이 되었다.
--- 「3부. 역동의 시대, 카페왕조」 중에서

잔 다르크는 1431년 재판으로 화형에 처해졌으나 1455년 복권 재판으로 이전 판결이 뒤집혔다. 과연 그녀는 마녀인가, 이단인가, 성녀인가, 혹은 열혈 애국 소녀인가? 잔 다르크 생시부터 그녀의 성격에 관한 논쟁이 지속되었다. … 많은 사람들은 잔 다르크를 성처녀(Pucelle)라 부른 반면,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천치(idiote), 몽테스키외는 ‘경건한 협잡’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녀를 애국적인 영웅으로 복권한 것은 미슐레다. 그러나 곧 사회주의자들이 자기편으로 삼아 조레스 등은 ‘세속의 성녀’ 식으로 표현했다. 그 후 가톨릭교회가 1909년에 복자로 시복하고 1920년에 성녀로 시성했는데, … 극우부터 극좌까지 모든 정치 파당이 잔 다르크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어다 쓰려고 했다. 잔 다르크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무한다. 예컨대 농민의 딸이 아니라 귀족의 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검 다루는 법을 알 수 있는가? 왕세자와 어떻게 대화가 가능한가? 심지어 화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았으며 1436년 라로셸 전투에 참전했다는 주장도 있다.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설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 「4부. 위기의 시대, 발루아왕조」 중에서

루이 14의 치세 중 부르주아가 번성하고 귀족이 쇠락했다고들 이야기해 왔다. 생시몽(Saint-Simon)은 회고록에서 귀족이 몰락하고 콜베르 같은 더러운 부르주아지가 번성했다고 서술했다. 귀족의 쇠락으로 권력이 독재로 변질했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다. … 이상의 내용이 19세기 스타일의 역사 해석이었다. 이들이 보기에 루이 14세는 절대군주이고, 콜베르는 성실한 부르주아의 모델로서, 왕정과 공화정을 이어 주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 과연 귀족이 이처럼 몰락하고 부르주아가 밑에서 올라오고 있었는가? 최근 연구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우선 콜베르는 무(無)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의 가문은 재정과 공직에 오래 머물렀던 가문으로서, 딸들은 모두 공작이나 고위 귀족들과 결혼했다. 과연 그는 부르주아의 승리를 대표하는가? 귀족이 몰락했는가? 사실 궁정에는 귀족들이 득시글거린다. 베르사유궁 안에 거처를 정한 대귀족만 360명에 달하는데, 왕과 함께 사냥하며 놀았고, 또한 지방에 통치자로 파견되었다. … 최근 연구들은 재정가들이라는 벼락출세자 뒤에 있는 진짜 전주(錢主)는 대귀족인데, 이들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 재정 사업에 투자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 귀족들이 일종의 부르주아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 「5부. 근대의 서막」 중에서

프랑스혁명 시기 학살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쟁 중이다. 어떻게 이런 가공할 일이 가능했는가? 어쩌면 혁명을 배태한 프랑스 사회 자체가 폭력적이었다. 루이 16세가 고문을 폐지했지만 그 이후 혁명기에도 고문은 계속되었다. 개인들도 폭력으로 문제를 풀고 귀족들은 리슐리외가 금지했는데도 결투를 지속했다. 폭력은 프랑스 사회 내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그러므로 혁명기 폭력은 기존 폭력이 격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놀라운 일은 바로 이 혁명기가 현대 프랑스의 탄생기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국가만 폭력을 독점하고 시민들이 다른 종류의 폭력에 희생되지 않아야 한다는 개념이 만들어진 시기라는 점이다. 폭력이 극단적으로 분출하면서 시민의 폭력을 배제하기로 한 매우 모순적인 시기임에 틀림없다.

1799년에서 1804년까지 프랑스는 ‘독재’ 상태에서 제국으로 이행해 갔다. 이때 ‘독재’란 로마 공화정에서 사용한 의미이다. 카이사르가 공화정의 독재관이 된 것은, 원로원이 합법적으로 그에게 6개월간 예외적 권한을 주어서 위기에 처한 로마를 구하라고 한 법률적 행위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이 일시적인 권한을 영구적인 것으로 바꾸어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고 암살당했다. 나폴레옹의 경우 ‘독재’는 과한 표현이기는 하다. 사실 무월 18일 쿠데타는 보나파르트, 로제 뒤코, 시에예스 3명의 집정관을 낳았다. 그중 제1집정관이 조만간 예외적 권력, 즉 대권을 장악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선 집정부제는 아직 공화정이다. 다시 말해 1792년 만들어진 체제와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다. 이는 또 공포정치에 비견되는 예외적 상황에서 벗어나 합법적 상황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구나 로마에 집정관이 두 명 존재한 것과 견주어 이 시대 프랑스에서 세 명의 집정관을 둔다는 것은 권력 통제 성향이 오히려 더 강하다는 의미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총재정부가 폐기한 보편선거도 부활했다. … 이렇게 합법성을 확보한 덕분에 행정 권력은 사법부로부터 독립적이고 그보다 더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르네 레몽에 따르면, 보나파르티슴의 핵심은 집정부제부터 자리 잡은 것이다.
--- 「6부. 계몽주의와 혁명」 중에서

루이 필리프에게 중요한 소품은 우산이었다. … 어느 날 비가 억수로 오는데 우산 없는 한 여성 노동자를 만났다. 국왕은 우산을 함께 쓰고 공장까지 데려다주었다. 얼마나 따뜻한 지도자인가! 루이 14세가 태양왕이라면 그는 우산왕으로 통했다. … 1831년 6월 12일 국왕이 메스(Metz)에서 열병식을 하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부가 망토를 건네주려 하자 국왕은 도로 가져가라는 손짓을 했다. 병사들이 망토를 입고 있지 않았으니, 국왕이 홀로 비를 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비에게 쓴 편지에서 루이 필리프는 그때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총명한 국민들이 내 생각을 번개같이 알아채고는 ‘브라보!’, ‘국왕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소. 이 일화는 순방 여정 내내 각지로 퍼져 나갔소.” 함께 비를 맞겠다는 표시는 특권의 종식과 평등을 상징했다. … 이후 통치자가 국민들과 함께 비를 맞는 일은 프랑스의 전통이 되었다.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인 11월 11일 행사에서 프랑스 대통령들은 흔히 루이 필리프처럼 비를 맞곤 했다. 특히 샤를 드골 대통령이 군모를 쓰고 의연하게 비를 맞는 모습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 파리코뮌과 관련한 소문과 신화가 만들어졌다. 의도적으로 파리 각지에 방화한 여자들 이야기, 인질들을 처형하는 장면을 합성한 사진작가 아페르의 작품들, ‘93년의 하이에나와 코뮌의 고릴라’ 식으로 폄훼한 테오필 고티에의 문학작품 등이 그런 예다. 이후 시기 코뮌 혁명은 심리적 병리 현상으로 파악되었다. 공화정과 사회주의 간 화해는 지극히 어려워졌다. 19세기에 타진했던 민중 자치의 가능성은 지워졌다. 코뮌은 좌파에게는 영웅적 신화로 남았으나, 우파에게는 살인범과 방화범이 날뛰는 무질서의 온상으로 기억되었다. 되돌아보건대, 오스만화는 붉은 교외 지역에 노동자들을 모으고 시내 지역을 보수적 부르주아 구역으로 만들어 갈등의 지리적 구분을 만든 효과를 냈다.
--- 「7부. 변화와 가능성의 세기」 중에서

전쟁을 겪은 후 사회의 전반적 성격에 변화가 있었는가? 조르주 모스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 사회가 전반적으로 ‘잔혹화’했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참호전, 집단 학살, 비인간적 처우 등의 공포스러운 경험이 문화적 영향을 미쳐서 폭력이 정상이 되고 더 나아가서 명예롭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병사들은 전쟁에서 겪은 폭력의 경험을 일상으로 가지고 왔다. 전쟁 프로파간다는 희생, 훈련, 복종 등을 이상화하면서 전사자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또 참호에서 대량 죽음에 노출된 경험이 폭력을 정당화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전후 사회는 갈등 해결에 폭력이 정당한 도구라고 보게 되었다. … 미술, 문학 등도 죽음, 희생, 영웅주의를 자주 거론하고 이를 국민 동질성의 일부로 만들었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모든 퇴역 군인이 폭력을 찬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평화주의에 경도되었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보다 프랑스나 영국에서는 ‘잔혹화’ 테제가 잘 맞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 돌아왔다는 느낌, 환희 등의 감정이 컸고, 폭력에 찬동하기보다는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즐겁게 노는 오락 분위기가 강했다. …

68운동은 ‘혁명답지 않은 혁명’이었다. 애초에 혁명적인 전복을 원하지도 않았고 가능성도 없었다. 어쩌면 그처럼 실현 불가능한 ‘가짜 혁명’이었기에 함성이 더 크고 화려했는지 모른다. 젊은이들은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을 원한다며 격렬한 항의를 했으나, 사실 어떤 구체적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 채 다만 막연하게 혁명과 해방을 외치고 있었다. 드골로 대변되는 우파 자유주의든 극좌 소비에트 공산주의든 기성 체제를 넘어서는 그 어떤 해방된 새로운 체제를 원한다고는 하는데, 그것이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자신들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진정성 있는 혁명 프로그램이 없는 대신 말의 성찬이 펼쳐졌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상상력에 권력을!’ 같은 열정적 구호들이 터져 나왔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불손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은 새로운 혁명의 무기다’, ‘파괴의 열정은 일종의 희열이다’, 이런 말들은 내면에서 터져 나온 열정의 표현일 수는 있겠으나, 사실 실현 가능성 없고 무책임한 주장이었다.
예스이십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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