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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우리돌의 광야
김동우 저 |수오서재
중앙아시아에 남은 독립운동 흔적들
'뭉우리돌을 찾아서' 『뭉우리돌의 광야』는 중앙아시아의 빛을 드러낸다. 그 빛은 독립운동가들의 넋이다. 엄혹한 일제강점기, 온몸으로 저항한 그들을 기억하는 게 남은 사람들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2026.08.14 손민규 역사 PD

지금 사시면?

[광복절 기획전] 여권케이스, 문진, 텀블러 (포인트 차감)

책속으로
낯선 땅 파란 하늘 아래 한인들 삶은 바람을 가르며 피어난 한 송이 야생화처럼 숭고하다. 그 모습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사라짐 앞에서 기억을 읊조리는 풍경이었다. 죽음 앞에서 삶을 찬양한 그 흔적을 찾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한동안 길을 헤맸다. 내가 보고자 한 건 망각의 강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기억의 파편이었다. 자세히 톺아보면 드넓은 광야에는 반짝이는 뭉우리돌이 여럿 박혀 있다. 사실 그것들은 어디로 가지도, 숨지도 않은 채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단지 우리가 보려 하지 않았을 뿐.
---p.71

조국과 분리된 한인들에게 무대는 정체성과 역사를 되뇌는 대체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한인 극단이 무대에 올린 작품은 흩어진 공동체 기억을 하나로 묶고 역사를 생생한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의례였을지 모른다. 국가는 부재했고, 영웅들은 무덤에 들어가 버렸다. 이 모든 걸 고려 극장은 다시 무대 위로 끌고 나와 사람들 가슴속에 살게 만들었다.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일을 해낸 셈이다.
---p.108

“어이!”
바람을 타고 언덕 밑에서 희미한 소리가 나부꼈다. 고개를 들어 비탈을 타고 들릴 듯 말 듯 전해지는 목소리 위치를 찾았다.
“뭐라고요? 어디 계세요?”
“아저씨! 여기요!”
저 멀리서 조 여사님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목소리에서 심마니의 흥분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다급한 외침이 점점 또렷해졌다. 예감이 좋았다. 부리나케 비탈을 뛰어 내려갔다.
“찾았소, 찾았소, 태장춘! 여기 보소.”
조 여사님이 함박웃음으로 날 바라봤다. 묘비에 적힌 이름과 생몰 연도가 정확했다.
“어…. 맞네요! 와!”
나는 조 여사님을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고 선교사님을 부르러 차로 뛰어갔다.
“선교사님! 찾았어요, 찾았어!”
차 문을 세차게 열며 상기된 표정으로 기쁜 소식을 알렸다.
“어머머, 벌써! 어머머, 가봐요, 가봐!”
‘태장춘 묘지 발굴단’은 출범과 동시에 천운을 등에 업고 카자흐스탄 현지 시각으로 2024년 10월 28일 오후 3시 40분경 태장춘 묘지를 발견하는 쾌거를 거뒀다. 그가 눈을 감은 지 정확히 64년 만의 일이었다.
---p.116

기쁨도 잠시 묘지 상태는 처참했다. 그간 눈, 비, 바람, 햇빛이 콘크리트 묘지를 산산조각 내버렸고, 그 모습은 마치 깨져버린 거북이 등껍질 같았다. 무덤 주변 철제 울타리는 녹으로 만든 두꺼운 갑옷을 입은 듯 붉게 산화해 있었다. 안타깝게도 무덤에는 영정이 그려진 흔한 비석조차 없었다. 그는 살아서 황무지에 내팽개쳐진 이주자였고, 죽어서는 광야에 내버려진 사람이었다. 꼴사나운 살풍경은 영원토록 외로움을 느끼란 어떤 형벌 같았다. 정작 벌을 받아야 하는 건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우리 모두인데 말이다.
---p.117

우슈토베에 살던 젊은 한인 후손들은 돈을 벌러 도시로, 한국으로 떠났다. 남겨진 노인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 이제 1세대 강제 이주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기가 도래했다. 그래도 아직 몇몇 한인 후손들은 강제 이주 직후 태어나 옛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마음이 바쁜 건 증발해버린 기억과 인정받지 못한 역사 그리고 다 듣지 못한 이야기가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일찍 길을 나섰더라면, 조금 더 부지런히 길을 다녔더라면, 기록하지 못한 날들을 조금 더 위로할 수 있었을 텐데.
---p.134

김: 그 총탄은 팔에 맞은 거예요, 어깨에 맞은 거예요?
최: 팔이 아니고 오른쪽 등 뒤 어깨 날갯죽지야(최봉설의 손녀가 검지로 내 오른쪽 등 뒤에 정확한 위치를 짚어주었다). 어디서는 다리라고 하는 데도 있었어. 분명히 오른쪽 등 뒤 어깨 아래야. 총을 맞고 일경들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신한촌에서) 바닷가 쪽으로 도망갔어. 그러다 친구 집에 숨어 들어갔지. 일경들이 두 번이나 개를 대동해 수색을 나왔는데, 그 집 딸이 핏자국을 다 치워주었지. 그때 도와준 그 집 딸들 나이가 스무 살, 열여덟 살이었다지. 거기서 ‘최계립’이란 가명을 만들었지. 왜냐하면 그 집 자식들이 ‘계’자 돌림이었거든. 친척이라 속여야 하니까. 그 사람들 덕분에 74세까지 사셨지.
---p.150

“할머니가 증조할아버지(최재형)와 함께 연해주에 살 때 집에 귀족들이 쓰는 큰 식탁이 있었대요. 은수저도 많았고요. 굉장히 좋은 음식을 많이 드셨다네요. 증조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참 행복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모든 게 변해버린 거죠. 증조할머니가 자식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어렵게 사셨다고 했어요. 사람들 눈을 피해 모스크바까지 가야 했대요. 그때 자매 다섯 명이 신발 한 켤레를 나눠 신었다고 해요. 집 밖에는 한 명밖에 못 나가는 거죠.”
최재형 서거 후 집안은 몰락했고 남겨진 자식들은 부르주아 출신이란 손가락질을 받으며 소련 전역에 흩어져 살게 된다. 그 팍팍했을 삶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대략 상상이 되는 이야기였다.
---p.270

우리에게 우즈베키스탄은 한인들 눈물이 스민 땅으로 각별하다. 1937년 강제 이주 열차는 카자흐스탄을 지나 우즈베키스탄 황무지에도 멈춰 섰다. 이주자들은 낯선 기후와 풍토, 알 수 없는 언어와 문화 속에 내던져졌다. 다행히 대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정직했으며 순리를 따랐다. 땅은 한인들의 신앙이었다. 그 믿음은 실의와 절망 속에서 무력감을 딛고 다시 일터로 나가는 힘이었다. 무지렁이같이 버려진 땅과 갈대밭에 전에 없던 손길이 닿기 시작한다. 거기 스민 땀방울은 해마다 대지 위에 황금빛 물결을 출렁이게 한다. 장쾌한 풍경을 만든 사람들은 이 땅을 스쳐간 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위대하다. 그 이야기는 철길에 내던져진 수많은 뭉우리돌처럼 어디선가 소리 없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p.311

안디잔에서 이인섭이 살았다는 집을 찾아다녔다. 거기 살고 있는 현지인들은 독립기념관에서 몇 해 전 조사 나왔던 일을 기억하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과 차를 마시며 예전 모습을 떠올려 봤다. 어딘가에서 한 노인이 종이 위에 만년필을 눌러쓰다 손님을 맞으러 나타날 것 같은 몽환에 사로잡혔다. 역사를 생명처럼 아낀 한 초인이 살던 집, 연민 가득한 따뜻한 볕이 쏟아지는 안디잔의 오후였다.
---p.331

제사를 지내던 한인 후손들에게 한국에서 왔다며 조심스레 촬영을 부탁했다. 그때마다 그들은 흔쾌히 곁을 내주었다. 그리고 촬영을 마칠 때쯤이면 어김없이 투박한 한마디가 날아왔다.
“입질 좀 하오?”
그들은 내게 보드카와 음식을 권했다. 한인 후손들이 차린 추석 성묘 상은 오랜 세월, 문화가 뒤섞이는 와중에도 억척스럽게 지켜낸 결과물이다. 이 모습을 보고 누가 감히 한국식으로 해야 한다며 어깃장을 놓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애틋하고 고마운 풍경 아닌가.
음식을 받아 입속에 넣었다. 한국도, 러시아도, 우즈베키스탄 것도 아닌 묘한 맛이 번져간다. 보드카를 넙죽 받아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소주보다 독하고 쓴 액체가 국적 불명 맛을 쓸고 내려간다. 얼얼한 목 넘김에 “캬” 하는 외마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_376쪽, 추석 풍경

잠시 뒤 최재형 며느리 무덤도 찾아냈다. 그 모습은 마치 폐허를 연상시켰다. 쇠 울타리는 붉게 녹슬어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외로운 긴 세월 앞에 한쪽으로 기울어진 십자가는 애도조차 포기한 듯했다. 최재형 가문의 몰락을 압축해 보여주는 을씨년스런 풍경이었다. 이들을 추모하는 건 이제 이름 모를 잡초와 가시덩굴뿐이었다. 풍경만 놓고 보면 끊어진 기억의 사슬을 온전히 잇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비탄 섞인 한숨이 절로 올라왔다. 무심한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건조한 바람이 마른 풀잎을 쓸고 지나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돌아서는 길 송곳 같은 가시들이 자꾸 살을 파고든다. 왜 이제 왔냐며, 왜 이렇게 늦었냐며 질책하듯. 최재형이 남긴 퍼즐 한 조각이 맞춰지는 날 풍경.
---p.388

중앙아시아의 국외독립운동사적지는 망각에 점령당한 곳이 많다. 지금 이 순간도 망각은 그곳에 외로움의 씨를 뿌려 현장을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불행하게도 돌보는 이 없는 이들 공간은 역사를 잊어가는 우리가 얻은 결과물이다. 우리는 그동안 치열하게 망각해 왔다. 그 잊어버림은 우리가 과거에 진 빚을 더욱 키울 뿐이다. 그렇다고 누구도 빚을 갚으라 강요하지 않는다. 원하는 건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는 빚이 있음을 자각하는 일이다. 이는 느슨한 기억을 다시 단단히 연결하는 출발점이다. 과거가 현재를 돕게 하는 방법은 이 길이 유일해 보인다.
이 책으로 대단한 무엇인가를 이뤄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 묻혀 있던 몇 개 뭉우리돌에 다시 빛을 비추었을 뿐이다. 독자들에게 부탁이 있다면, 이 책이 제시한 몇 개 좌표를 기억해주면 좋겠다. 기회가 된다면 그 좌표를 따라 여행해보길 권한다. 그 행위 자체가 기억의 연결고리를 공고히 하는 일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건은 순간이지만 비극은 길다. 추모의 행렬은 비극의 길이만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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